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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가볼만한 김천의 명소

수려한 경관과 유서 깊은 전설을 머금은 산사(山寺)
최도철 기자 / che7844@hanmail.net입력 : 2014년 08월 29일

ⓒ 김천내일신문
수도산 청암사(靑巖寺)

역시 계절의 힘은 위대하다.
난데없는 늦장마가 요란스럽더니 살그머니 다가선 가을은 먹구름을 저만치 밀어내고 파란 가을하늘을 내보이고 있다.
향긋한 가을바람이 기다리던 추석을 실어오면 대체휴일을 포함해 최대 5일까지 누릴 수 있는 황금연휴에 정겨운 가족들과 함께 김천의 문화유산을 찾아 역사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지?
그중에서도 한강 정구선생이 천하절경지로 꼽았다는 수도계곡과 함께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가 숨어살았었다는 청암사를 돌아보는 것도 보람 있는 연휴 만들기가 아닐까 싶다.
 
[청암사 가는 길]
수도산 청암사는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장뜰마을 뒤 수도산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산에서 발원하여 심산유곡을 이룬 수도계곡에 인접하여 예부터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김천시내에서 청암사를 찾는 길은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우선 거창방면의 국도 3호선을 따라 가다가 지례면 여배리 속수마을에서 가목재를 넘어가는 길이 있다. 속칭 아흔아홉구비라 하여 길은 다소 험하지만 굽이쳐 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또 대덕면 관기리까지 더 나아가서 추량리를 지나 가릿재를 넘어가는 길이 있다. 아니면 양천동 폭포에서 1㎞남짓 가다가 조마면 쪽으로 길을 잡고 면소재지를 지나 지례와 성주군 경계에서 대가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도있다. 조선중기 영남 예학의 근간을 형성한 한강 정구가 무흘구곡으로 노래한 대가천의 수려한 경관 또한 청암사가 선물하는 또 다른 선물이다. 어느 길을 택하던 통상 승용차로 40분은 족히 걸리는 길이다.

[청암사 이름의 유래]
사천왕문으로부터 게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게곡 좌우로 푸른 이끼로 뒤덮힌 웅장한 바위벽을 볼 수 있다. 푸른 이끼가 바위를 덮어푸른 바위가 되었다라는 뜻으로 푸를청(靑)에 바위암(巖)자를 써서 청암사라 했다고 한다.

[쌍계사의 암자였던 청암사]
청암사의 본사인 쌍계사는 증산면 유성리 옥동마을에 있었던 대찰로 1951년 7월 14일 북한군 패잔병들이 임시 증산면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던 쌍계사에 불을 질러 전소되었다.
이때 일체의 자료들이 소실되어 정확한 사찰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도선국사가 850년(헌안왕 3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대웅전의 천장 그림과 4폭 탱화가 유명했었다고 전한다.
소실당시를 목격한 주민들에 의하면 이틀동안 연기가 났다고 하며 거의 대부분의 전각과 유물이 불타고 훼손된 범종이 남아 청암사로 옮겼다가 지금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증산면 동안리 증산중학교 교정에 괘불지주석과 맷돌 등 석물이 일부 남아있으며 남산동 개운사에 1685년 조성된 쌍계사 목조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이전 봉안되어 있는데 2003년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440호로 지정이 되었다. 1943년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고미술전시회출품을 위해 옮겨왔다가 해방이 되면서 김천역에 방치한 것을 개운사에서 명부전을 신축해 봉안한 것이다.
현재의 증산우체국 자리에 일주문, 증산지서 자리에 천왕문이 있었다고 하며 면사무소 마당에 남아있는 노송 옆으로 오솔길이 있었고 면사무소 뒤로 대웅전이 있었는데 장정들이 대웅전앞에서 돌을 던져도 아무도 넘기는 사람이 없을 만치 높고 웅장했다고 한다. 현재도 웅장한 주춧돌이 증산면사무소 뒤에 그대로 남아있어 쌍게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뚜렷한 연꽃문양을 한 배례석과 귀부, 부도와 비석 도 남아있다. 증산면사무소가 위치한 거대한 절터에는 초석과 석조연화문 등 석물만 남아있고 이곳에 있던 범종은 6.25 당시 파손되어 청암사로 옮겨졌으나 사용이 불가능해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1992년 1월에 800관의 범종을 새로 조성하였다.
쌍계사 터는 예부터 호랑이와 용 중간에 자리한 대길지로 알려져 있는데 도선국사가 절을 세우면서 “僧千年 俗千年”이라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이 터에는 스님들이 천년 살고 일반 속인들이 천년 살 것이라는 것으로 쌍계사가 창건된 지 1100년 후인 1951년에 소실됐고 또 그 터에 현재와 같이 마을이 들어선 것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예언임을 알 수 있다.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출신으로 신라말 승려로서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태조 왕건의 출생을 예언해 유명해 졌으며 사후 고려 왕실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던 인물이다.

[신비로운 우비천 전설]
쌍계사의 말사가운데 하나인 청암사는 본사인 쌍계사로부터 2㎞거리에 위치한 산내암자로 신라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청암사사적』에 따르면 “청암사는 이웃한 쌍계, 수도 양사와 함께 신라 헌안(憲安), 헌강(憲康). 양조(兩朝)에 걸쳐 창건된 사찰이며 도선국사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서 건립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도선국사가 명당을 가려 나라의 국운을 융성하게 할 목적으로 청암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인데 실재로 청암사의 지형은 예부터 풍수지리로 볼 때 소가 왼쪽으로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전설이 우비천(牛鼻泉) 전설이다.
절 입구의 천왕문 안쪽에 위치한 우비천으로 불리는 옹달샘이 누워있는 소의 코에 해당되고 대웅전이 소의 뿔에 해당되는데 소의 코는 항상 물기가 촉촉이 젖어있어야 건강한 관계로 청암사의 사세가 번창할 때는 우비천의 물이 많이 고여 넘쳐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천왕문 앞으로 다리를 새로 개설하여 찻길을 내고부터는 우비천물이 말라버려 모두들 의아해 했는데 이것은 찻길을 낸 자리가 누워있는 소의 목에 해당되어 목을 수시로 차와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기 때문에 소가 아파 우비천의 샘물이 말랐다는 것이다. 또 이 물을 마시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에 따라 스님들은 이 샘을 지날 때마다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청암사 중창의 역사]
청암사는 창건 이래 여러 차례의 화재로 전각이 소실되고 중창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청암사는 1647년(인조25년)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벽암(碧巖) 성총화상(性聰和尙)이 덕유산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허정대사(虛靜大師)로 하여금 청암사를 재건토록 했는데 이것이 1차 중창이다. 1736년(영조12년) 산사태로 문루가 유실되자 회암정혜(晦庵定慧)조사가 2차 중창을 이루었다. 이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1782년(정조6년) 4월에 에 다시 큰 화재가 발생해 육화료를 비롯한 모든 전각이 소실되자 환우대사(喚愚大師)가 다시 신궁보전과 누각을 중건하였는데 이를 3차 중창이라 한다.


1905년(고종9년) 주지 용각화상(龍覺和尙)이 보광전을 건립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입적하자 대운화상이 이어받아 완성하고 가야산 용기사로부터 청동관음보살상을 이안해 봉안했다. 보광전 청동42수관음보살상은 1975년 도난당하고 1992년 6월 목조사십이수관음상을 조성하여 다시 봉안하였다.


1905년(광무9년) 대운화상은 최송설당의 시주로 보광전과 극락전을 신축하고 가야산 용기사에서 42수청동관음상을 모셔와 봉안했다. 또 1906년 겨울에 비구니 유안사(有安師)의 발원으로 백련암을 창건되었다.


1911년 9월 21일 청암사는 다시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는데 대운대사(大雲大師)가 그 다음해 봄부터 대웅전과 육화료,진영각을 신축하고 1921년 중국 항주의 영은사에서 목조석가모니불상을 조성해 대웅전에 봉안하니 이를 4차 중창이라 한다. 이때 비구니 유안사(有安師)가 2,000환을 시주한 것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시주가 있었다. 일설에 대운화상이 꿈에 빨간 주머니를 여인으로부터 얻는 꿈을 꾼 후에 서울에 갔는데 나이가 많은 보살이 많은 시주를 하면서 자신이 죽은 후 3년간 염불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이로부터 불사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7년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이 설립되고 도난당한 청동42수관세음보살상을 대신해 목조 42수 관세음보사을 보광전에 봉안하고 대웅전, 육화료, 진영각,보광전, 극락전, 정법루, 사천왕문, 일주문을 보수하였으며 중현당, 선열당, 백화당, 자양전, 범종각을 신축하여 5차 중창을 이루었다.

[인현왕후와 청암사]
극락전은 청암사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암자로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간계로 1689년 서인으로 강등되어 청암사로 들어와 3년간 기거하며 복위를 기원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당시 청암사에서는 인현왕후를 배려하고자 거처로서 남별당을 왕실건축양식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인현왕후는 청암사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당시에 지금의 극락전 자리에 축각(祝閣)을 짓고 복위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훗날 복위되어 환궁 후에 “큰 스님 기도의 영험으로 내가 복권되었다”라는 내용의 감사 편지를 보내오고 청암사주변 불령산을 국가보호림으로 지정함과 동시에 사찰에 전답을 내렸다고 한다.  

 
극락전을 중창할 때 나온 시주록에는 궁중 상궁들의 이름이 26명이나 올라있어 인현왕후로부터 비롯된 청암사와 조선왕실과의 인연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말까지 상궁들이 수시로 청암사에 내려와 신앙생활을 했는데 청암사에 많은 토지를 희사한 최송설당은 김천중고등학교의 설립자로도 유명하다.

[불교 강원(講院)으로 명성을 얻다]
청암사는 조선시대 때부터 불교강원으로서 명성을 얻었는데 청암사 강원의 효시는 조선중기 대 강백으로 유명한 회암정혜(晦庵定慧.1685-1741)선사가 1660년 선원과 강원을 설립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회암선사는 화엄학에 정통한 교학(敎學)의 대가로 당시 청암사로 운집한 학인이 3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후에도 불교강원으로서의 명성은 계속 이어져 일제 강점기의 박한영(朴漢永) 강백(姜伯)이 강론 할 때 학승의 수가 200여명에 이르렀고 강고봉(姜高峰) 강백이 가르치던 1975년도까지도 매년 40여 명에 달했다.


현 주지이자 강주인 의정지형(義淨志炯)스님이 1987년 3월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면서 현재 110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는 도량으로서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2007년 4월에는 청암사율원을 개원하여 계(戒)와 율(律)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주요 전각과 당우, 문루]
청암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일주문이다. 현판 글씨인 “佛靈山靑巖寺”는 근세의 명필가중 한사람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1871-1937)의 글이다. 사천왕문은 절 입구에 위치한 정면 3간, 측면 1간의 맞배집 건물로 내부에는 사천왕 탱화 4점을 봉안하였는데 모두 삼베바탕에 어 있다.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로 제120호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912년부터 주지 대운화상에 의해 3년의 공사 끝에 정면 3간. 측면 2간, 총 23평의 팔작지붕으로 완공되었으며 대웅전 현판은 김돈희의 글씨이다. 대웅전내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 후불탱, 산신탱, 신중탱, 칠성탱, 독성탱이 함께 모셔져 있다. 청암사 대웅전 단청은 흰색이 강조된 부드러운 단청으로 유명하며 1976년 10월 청개와로 번와 불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법루는 대웅전 앞에 위치한 누각으로 정면 5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이며 현판은 김돈희의 글씨이다. 과거 불교 강원의 강당과 범종각으로 사용되었다. 육화료는 을자형에 귀틀을 지닌 건물로서 정면 8간, 측면8간의 팔작지붕으로 1987년 6월 중수와 함께 기와를 번와했다. 극락전은 청암사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암자로 본법당인 극락전과 보광전, 백화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화당은 원래 인현왕후의 거처로서 남별당이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87년 신축하면서 백화당으로 개액했다.


극락전은 정면 7간, 측면 7간의 팔작지붕이며, 측면 2간은 2층 누대를 설치한 복합건물로 1905년 대운화상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석조아미타여래좌상과 후불탱, 그리고 신중탱을 봉안하고 있다. 보광전은 191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대운대사가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으로 중건했는데  목조42수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있다. 1994년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88호로 지정됐다. 보광전이 처음 창건된 연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1782년(정조6년) 화재로 소실되자 환우대사가 보광전을 중건했다는 기록을 통해볼 때 그전부터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설에는 인현왕후가 이곳에 은거할 때 복위를 기원하는 원당으로서 보광전을 세웠다고도 한다. 보광전을 중건할 때 나온 시주록 현판에는 궁궐의 상궁 26명의 이름이 적혀있기도 했다.  

[소장문화재]
청암사에는 상당수의 성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탱화에 제한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대웅전의 흑색 바탕에 금선으로 그려진 아미타삼존탱화는 흔치 않은 작품으로 좌우 협시보살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등장시켰다. 또 22점의 조사영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영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앞 다층석탑은 대운대사가 1912년에 성주에서 이전해 왔다고 전해진다. 2중의 기단위에 4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나 원래는 5층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1층 몸돌의 4면에는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큰 것이 특징이며 1985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121호로 지정되었다.

[산내암자]
청암사의 산내암자로는 백련암과 수도암이 있다.
백련암은 원래 비구니 스님들의 작은 거처였는데 1906(광무10년) 유안사(有安師) 등의 시주로써 1905년 겨울에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에 건립하였다. 건립당시에는 3동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수마제전을 비롯하여 칠성각 등의 요사가 더 건립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7간, 측면 4간의 팔작지붕이며 수마제전은 극락전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법당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였다. 칠성각은 정면 3간, 측면 1간이며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하고 있다.


최도철 기자 / che7844@hanmail.net입력 : 2014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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