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해 보다도 짧게 끝이 난 장마로 인해 연일 찜통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매일 기록을 경신해 나가는 더위는 밤까지 이어져 밤잠을 설치게 하는 열대야가지 기승을 부리면서 불면의 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찬바람이 솔솔 나오는 천연 에어컨이 장착된 이색적인 동굴 두곳이 있으니 바로 남면 부상리 부상터널과 부항면 해인리 금광동굴이 그것이다. 가족, 지인과 함께 김천지역에 소재한 이색적인 동굴에서의 피서를 즐겨보자<편집자주>
<남면 부상터널> 1905년 일제에 의해 경부선 터널로 개통, 1916년 아포로 우회뒤 방치 2백여미터 원형보존돼 한국전쟁때 인민군 야전병원, 임시 사령부로 이용 한여름에도 찬바람 불어 이색 동굴 피서지로 마을주민들 예부터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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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4호선 대구방면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칠곡군 약목면, 성주군 벽진면과의 경계인 남면 부상리로 속한 부상마을이 있다. 부상고개, 폐교된 부상초등학교, 부상국수집 등으로만 알려진 한적한 시골마을에 불과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가야금을 만든 가야의 우륵이 이 마을에서 짠 명주실로만 가야금줄을 매었다고 전할만치 양잠으로 유명했던 마을이었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말까지 관리들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고 역로로 불린 도로를 관장했던 부상역이라는 역참이 있었던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폐교된 부상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부상역에서 머물고 남겼다는 시와 행적을 기리는 비석이 1960년대까지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범상치 않은 마을임에 틀림없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 2000년대 초 김천시지역혁신협의회에서 주관한 “마을의 보물을 활용한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사업을 통해 이 마을 지하에 엄청난 보물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보물은 바로 금오산터널, 속칭 부상터널이다. 부상마을 주민과 인근 마을 주민들만 알고 있었던 감추어진 역사의 봉인이 일반인들에게 해제된 순간이었다. 대략 길이 350미터, 높이 5미터, 너비 4.5미터로 화강암과 적벽돌로 정교하게 구축된 미지의 인공 원시림. 나이는 118살이다. 대한제국 말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침략과 물자수탈을 위해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경부선 철도 부설권을 강압적으로 따내고 1901년 공사에 착수, 마침내 1905년 준공과 동시에 철도운영에 들어갔다. 이때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도의 접점에 위치하며 예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일컬어졌던 김천의 허허벌판 미나리깡에도 웅장한 역이 들어섰으니 다름 아닌 평화동 현재의 김천역이다. 서울에서 출발한 기차는 수원, 천안, 대전, 김천을 거쳐 대구로 내달리는데 이때 특이한 점은 1905년부터 1915년까지 10년간 경유지 어디에도 구미가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 바로 부상터널의 비밀이 담겨있다. 개통 당시 경부선 철도는 김천역, 금오산역(남면 부상리 부상마을), 약목역, 왜관역, 지천역, 대구역으로 연결된 직선 노선으로 건설되었는데 지금의 KTX와 비슷한 노선으로 보면 된다. 경부선 철도 부설에 참여한 당시 일본인 시공업체 관계자들은 1800년대유럽의 철도강국 영국과 독일에 유학하며 평야지가 대부분인 유럽식 철도건설방식을 적용하다보니 산지가 대부분인 우리나라 철도 노선 부설에 많은 난관과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전해진다. 부상터널도 이같은 실수의 산물로서 당시 석탄을 주원료로 하는 증기기관차의 동력으로는 단번에 부상고개 터널을 오르지 못하는 사태가 반복되자 1910년 산지가 아닌 평야지로의 대체 노선 공사에 착수해 마침내 1916년 현재와 같은 김천역, 대신역, 아포역, 구미역, 약목역으로 우회철로를 준공, 운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철도노선 변경이라는 점을 뛰어넘어 김천지역과 구미에도 큰 파급효과를 미쳤으니 기존철로가 경유하던 농소면, 남면이 쇠퇴하고 대안노선으로 선택된 아포, 구미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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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905년부터 1915년까지 10년간의 짧은 운행 후 107년간 잊혀진 세월을 보내다보니 그 형태가 신기로울 만큼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김천역 방향 입구는 자세한 내력은 알길이 없으나 언젠가부터 제방이 쌓여 터널 입구 절반이나 물에 잠긴 저수지가 되어 잠수나 배를 타지않고는 내부로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구축된 입구의 상단에는 “金烏山隧道”라 음각되어 있는데 “금오산수도”의 수도는 터널(굴)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지명을 통해 당시까지 부상고개를 금오산에 딸린 산자락으로 보았다는 반증이다. 예전 부상고개주유소가 있었던 아래로 관통된 터널은 350미터를 달려 부상마을 중간지점에서 불쑥 출구를 드러내는데 워낙 마을안쪽 깊숙이 있다 보니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숨어있다. 자칫 방심하다가 발이라도 헛디디면 출구쪽 절벽아래로 추락하기 십상이다. 터널 출구 상단 도로변에 고목 뽕나무가 울타리 역할을 해주고 있어 다행일 정도로 위태롭기 짝이 없다. 마을 주민들의 기억에 따르면 터널로서 용도 폐기된 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입구와 출구를 봉쇄해 출입을 막았었고 광복 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레일과 부속장치들을 앞다투어 떼어갔다고 한다. 부상터널 인근의 사모실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영일씨(56세)는 “학교 다녀오면 동네아이들은 대부분 부상터널에 들어가 술래잡기나 귀신놀이를 하며 놀았는데 소도둑놈들이 소를 훔쳐 이곳에서 밀도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 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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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0년대 초 “마을 보물찾기를 통한 살기좋은 마을 가꾸기”사업의 일환으로 마을에서는 부상터널을 보물로 정하고 2천만원의 예산을 들여쓰레기와 오물로 가득찬 터널을 청소하고 지상에서 터널 바닥으로 내려가는 철계단을 설치했다. 이때 일부 언론보도를 통해 부상터널을 실체가 알려질 수 있었다. 김천역방향 터널 입구와 마찬가지로 출구쪽 외벽과 내부하단도 화강암으로 성벽처럼 견고하게 쌓여있고 내부 내벽 상단과 터널 특유의 아치형 천정은 적벽돌로 조성되었는데 1백여년의 세월이 무색하리만큼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출구 상단에는 한자로 “日進無疆”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일진무강”은 “나날이 나아가 경계(한계)를 없앤다”라는 의미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대륙침략의 야욕을 철로를 통해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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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와 광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잊혀졌던 부상터널의 존재는 1950년 한국전쟁 도중에 잠시 재조명되기도 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간 국군은 대구 사수를 목표로 결사항전 태세를 갖추자 왜관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전선이 구축되어 전선은 밀고 밀리는 교착상태가 이어진다.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인해 많은 부상자가 속출한 북한군은 왜관의 후방인 김천에 임시사령부와 부상병 치료를 위한 야전 병원지를 물색하였는데 마침 지하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부상터널을 최적지로 선택하게 된다. 1950년 8월 3일, 북한군 최고수뇌부가 교착상태에 뻐진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들을 독려하고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부상터널을 방문할 것이라는 첩보가 미군 정보기관에 탐지되어 항공기를 이용한 집중 폭격이 가해졌다. 당시 전투기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탄과 총탄 흔적이 부상터널 출구 외벽 곳곳에 선명히 남아있다. 당시 부상마을은 철로와 터널이 용도폐기 된 후 철로변과 터널 주위로 주택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때의 폭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참고로 8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간 낙동강 전선 시찰과 부상터널 야전병원 부상자들을 위문한 북한군 수뇌부는 김천고등학교 설립자 최송설당이 고종때 영친왕의 보모상궁으로 있다가 낙향해 궁궐양식으로 건립한 정걸재를 숙박처로 삼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또한 미군 첩보부대에 탐지되어 항공기의 집중 포격을 받았으나 수뇌부는 이미 피신한 후였고 남한 최고의 대저택으로 불린 정걸재만 소실되어 지금은 주춧돌과 별채만이 남아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부항면 해인리 금광동굴> 부항면 삼도봉 일대 금 발견되며 일제강점기까지 금광개발로 북적 해인리 금광 원형 보존되어 예부터 마을주민 피서지로 각광 한여름에도 찬바람 불어 야채, 김치 천연저장고로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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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김천을 대표하는 지명들에는 유독 쇠금(金)자가 들어간다. 김천(金泉), 김산(金山), 금릉(金陵)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 볼때도 예부터 김천지방에는 금이 많이 생산되었고 특히 감천의 모래에는 사금(砂金)이 많이 함유되어 모래 반출이 많았고 일제강점기에는 김천장에서 실제 금이 거래되기도 했는데 일설에 황금동이나 황금시장이니 하는 이름도 김천의 금과 관련되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김천 전역에서 금이 생산되었는데 특히 삼도봉 일대의 해인리, 대야리가 그 중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금광업자들이 당시로서는 신형 채굴기를 들여와 대량으로 생산해 전국적인 금산지로 김천이 곽광을 받았다. 당시 수십개소에 달하는 금광을 뚫었는데 광복과 함께 일본인들이 철수하고 방치된 폐금광 동굴이 현재도 다수 남아있다. 특히 부항면 대야리에 현재 보존상태가 양호한 금광의 경우 길이가 2백여미터에 달하는 것도 남아있다. 인근마을 주민들은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불어나오는 폐금광을 활용해 감자, 배추, 무 등의야채를 저장하거나 피서지로 활용해왔다. 한여름에도 외투를 입고 들어갈 정도로 기온이 낮아 소문을 듣고 타지에서 찾아오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는 후문이다. 금년은 역사상 최단기간의 장마로 인해 역대급 폭염을 기록하고 있다. 계곡으로, 바다로 여름피서를 떠나지만 내륙인 무주군에서는 머루와인터널, 청도군 감와인터널, 영동군 포도와인터널과 같은 기존 폐터널과 동굴을 활용한 피서지를 활용해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다. 우리고장 김천에서도 부상터널과 해인리 금광동굴로 이색적인 피서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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