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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 전설을 찾아서

사모바위, 할미바위 등 바위관련 전설 유독 많아
전통과 지역민이 교감하며 형성되어 온 고장의 전설
설 연휴 자녀들과 전설의 현장 찾아 역사 산교육장 활용

최도철 기자 / che7844@hanmail.net입력 : 2024년 01월 23일
김천은 가히 전설의 고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읍면동 골골이 스며있는 마을, 산, 계곡, 바위, 하천, 나무 하나에도 이름과 풍수지리를 비롯해 흥미진진한 전설들이 잔뜩 묻어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온 전설에 대해 일부에서는 비과학적이니 미신이니 하며 가볍게 대하는 풍조가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역사, 민속학자들 사이에서 전설과 구전은 엄연히 사실에서 파생된 역사의 한 분야로 활발한 연구대상으로 자리잡은지 오래이다.
우리고장에 유독 전설이 많이 전해지는 것은 감문국으로부터 시작된 유구한 역사와 산과 하천, 마을이 어울어지는 자연경관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김천은 바위에 얽힌 전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다가오는 설 연휴, 우리고장 김천에 산재한 전설의 현장으로 가족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편집자주>

사모바위 할미바위전설
사모바위, 할미바위 전설은 에부터 김천을 대표하는 전설로 자리를 잡았다. 양천동 하로마을 입구에 있는 사모(紗帽/옛날 관리들이 쓰는 모자) 형상의 바위로 원래 모암동 모암산 서쪽 절벽에 있었다.
김천이 조선시대 초까지 이약동, 최선문, 이호성, 조위, 이숙기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문화적 번성기를 구가하며 영남제일문향으로 불렸는데 연산군 때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며 지역출신 선비들이 큰 참화를 겪기에 이르렀다. 이후 김천은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막히고 침체기에 들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사모바위전설이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시대 김천역 앞산(모암산)에 사모형상의 바위가 있는데 그 형상이 관리가 사용하는 사모를 닮아 그 기를 받아 김천에 과거급제자가 많다는 속설이 내려왔다. 과거에 급제하고 승승장구하던 고관대작들이 수시로 고향 김천을 방문하게 되자 수발을 책임진 김천역의 역리들이 매번 고초를 당했는데 어느 날 한 역리의 꿈에 사모바위를 깨트리면 과거급제자가 끊길 것이라는 한 도인의 예언을 듣고 다음날 바위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게 된다.

▲사모바위

이후부터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지 않자 화순최씨와 벽진이씨 집성촌인 하로마을 주민들이 이를 수레에 싣고가 마을앞에 모셔두고 옛 영화가 다시 찿아오기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것은 사화를 겪으며 중앙으로부터 당한 이 지역 백성들의 울분과 새로운 희망을 향한 염원이 사모바위전설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것이다.
지금도 자녀의 진학이나 시험이 있을 때 소문을 들은 일부 사람들이 찾아와 사모바위에 촛불을 밝히거나 돈을 두고 가는 사람들이 있을정도로 사모바위에 대한 지역민의 믿음이 이어지고 있다.
사모바위와 함께 할미바위에 대한 전설도 계속되고 있다.
할미바위는 양금폭포 아래에 있는 바위로 옛날 지례로 이어지는 국도변에 인접해 오가는 길손들의 득남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바위이다. 할미바위로 불리게 된 사연은 할머니의 굽은 등처럼 형태가 꼬부랑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바위 앞에 자신의 등을 붙이고 돌을 머리위로 던져서 바위를 넘기면 득남할 수 있다는 것으로 앞으로 돌출된 바위 상부 형태상 넘기는 것이 극히 어려웠다는 증언이다.

▲할미바위

또 달리 옛날 황금동, 모암동 일대에 고층 건물이 없을때는 이 할미바위에서 모암산 서쪽 절벽에 있던 사모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음으로해서 풍수적으로 할미바위는 신부, 사모바위는 신랑으로 혼인하는 초례청 형국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따라서 두 바위 사이에 과거 김천장이 전국적인 규모로 번성하고 약물내기 유기공방이 크게 발전한 것이 혼례식에 참석한 하객들이 장꾼이고 이들을 접대하기위한 음식 담을 그릇이 필요해 방짜유기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는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이다.

내입석마을 정승바위 전설
내입석은 봉산면 예지리로 속한 마을로 조선시대에 충청도 황간현과 경상도 김산군의 경계가 되었던 마을이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앞에 큰 바위가 튀어나와 있는데 정승바위라 불린다. 조선 성종과 연산군때 판서와 정승을 지낸 이극배가 이 마을에 살았었는데 과거에 급제해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부인은 이 마을에 떨어져 살게 했다.
남편과 함께 살고 싶은 부인은 스님에게 시주를 듬뿍하며 남편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도를 물었는데 스님은 소금 한 가마니를 집앞 연못에 뿌리고 마을 입구의 돌출된 바위를 깨트리면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부인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학이 연못에서 날아올랐는데 그로부터 몇일 후 남편이 죽어 상여에 실려 마을에 들어오는데 마을입구의 튀어나온 바위를 부인이 미리 깨트린 덕분으로 큰 상여가 무탈하게 들어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정승을 배출한 이름난 바위를 깨트리고 명당인 집의 연못에 소금을 뿌렸기 때문에 명당의 기운을 받아 정승이 된 남편이 죽은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정승바위

용강산 미륵바위 전설
어모면 군자리 하덕마을과 은림리 상군마을, 덕마리 상덕마을의 중간에는 용강산이라는 이름의 야산이 솟아있다. 산 정상에는 미륵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예부터 상군마을에서 이 바위가 보이면 마을의 처녀가 미치고 상덕마을에서 보이면 마을에 불이 나고 하덕마을에서 보이면 마을에 경사가 있다고 하여 상군과 상덕마을에서는 주민들이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 이 바위가 보이지 않게 하고 하덕마을에서는 나무를 베고 흙을 파내어 잘 보이도록 했다고 전설이 전한다.
과거에는 마을마다 당번을 정해 주기적으로 이 바위를 지키고 관리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옛날 하덕마을 주민들이 바위가 잘 보이게 나무를 베고 흙을 파냈던 흔적이 남아있어 주민들이 이 전설에 갖는 애정이 남다름을 알 수 있다.

▲미륵바위

수도암 비로자나불상과 칡이 사라진 전설
신라 말인 서기 859년 쌍계사의 산내 암자로 창건된 수도암은 최치원이 화엄 10찰로 꼽을 만치 큰 사찰로 처음에는 보광사라 했다. 주불인 대적광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중 가장 큰 규모의 불상 중 하나인데 거창 불당골에서 제작한 후 고지대에 자리한 수도암으로 봉안을 하지 못해 스님과 불자, 석공 모두 난감해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노승이 찾아와 불상을 엎고 달리기 시작했다. 수도암이 있는 수도산 중턱까지 왔는데 그만 칡 덩쿨에 발이 걸려 넘어져 불상을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화가 난 스님이 수도산 산신령을 불러 감히 부처님을 모시는데 칡 넝쿨 따위가 방해해서 되겠냐며 앞으로 수도산에 칡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라고 호통을 친 후부터 수도산에는 현재까지도 칡이 자라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비로자나불좌상

개령 계림사와 아포 함골 이름에 얽힌 전설
개령면 동부리에 있는 감문산은 예부터 풍수지리로 볼 때 호랑이의 형국이라 했다. 감문산에 속한 봉우리 중 호두산은 호랑이의 머리에 해당하고 취적봉은 몸뚱이라 했는데 호랑이의 머리가 하필 감천을 건너 맞은 편 아포읍 대신리 한골마을을 향함으로 하여 이 마을 사람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도리사에서 직지사를 짓기 위해 마을 앞을 지나던 아도화상이 이러한 사정을 듣고 호랑이의 살상기운을 제압하기 위해 호랑이의 심장자리에 절을 짓고 호랑이와 상극에 해당하는 동물인 닭이 많이 산다는 의미를 담아 닭 계(鷄), 수풀 림(林)자를 써서 계림사라 이름했다는 것이다. 또 한골마을의 이름을 빠질 함(陷)자로 바꾸어 함골로 부르게 하여 호랑이가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 맞은편 마을을 쳐다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계림사

뱀 머리 태봉과 개구리봉 전설
직지사 대웅전 뒷산인 태봉은 예부터 뱀의 머리에 해당한다는 사두혈(蛇頭穴)의 명당으로 이름이 났는데 풍수지리로 볼 때 뱀이 머리를 들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조선 2대 정종 임금의 탯줄을 이 산 봉우리에 안치했는데 일제시대에 이 산에 딸린 개구리봉으로 불리는 봉우리를 매입한 구미 인동의 장씨 성을 가진 부자가 유언으로 왕의 태가 묻힌 태봉 근처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초상이 나서 자손들이 개구리봉에 조상의 묘소를 들이려고 지관을 보냈더니 명당임에는 분명하나 주산인 태봉의 뱀의 기운이 드세어 멸문지화를 당할 자리라고 반대했다.
방지책을 물었더니 두가지를 제시했는데 한 가지는 산을 잘라 개구리봉으로 들어오는 뱀의 기운을 막고 뱀이 개구리를 먹으려고 할 때 개구리의 피난처로서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가 필요하다하여 옆에 저수지를 판 연후에 묘를 들였다는 것인데 지금의 사명대사공원 평화의 탑 연못이 그때 개구리의 피난처로서 판 저수지라고 알려지고 있다.

▲태봉과 개구리봉

직지사 금강문에 얽힌 여인의 한
직지사 금강문에는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죽은 여인의 한이 서린 금강문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합천에서 제일가는 부자에게 무남독녀가 있었다. 오래도록 시집을 가지 않더니 어느날 떠돌이 승려에게 반하여 상사병이 걸리고 말았다. 부자가 스님에게 사정하여 억지혼사를 치르고 처가살이를 하던 중 아들을 낳았다. 늘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던 아내는 처자식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 것으로 믿고 감추어 두었던 가사와 장삼, 목탁을 보여주었는데 또다시 불심이 발동한 남편은 야반도주하여 직지사로 들어가 버렸다. 아들을 업고 남편을 만나기 위해 여러 날을 달려온 아내는 직지사 금강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여인의 기일마다 스님이 한명씩 죽자 직지사에서는 여인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 고승의 권유에 따라 여인이 죽은 자리에 잡귀를 물리친다는 금강역사를 모신 금강문을 지은 후부터 스님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직지사 금강문

연산군과 직지사 감나무 전설
직지사에는 조선 제7대 세조 때부터 감을 나라에 바치는 반시진상법이 내려왔다. 이것은 학조대사가 주지로 있을 때 직지사에서 보낸 감맛을 본 세조가 매년 바치도록 권하여 시작되었는데 연산군 때 학조대사가 상소를 올려 궁궐에서 관리를 보내어 직접 따서 가져갈 것을 요구하면서 왕실과 대립하게 되었다. 연산군이 대노하여 학조를 잡아오라고 하였으나 왕비 신씨가 선대왕으로부터 우대하던 노승을 함부로 해치면 안된다고 연산군을 설득하고 편지로서 학조스님의 의중을 돌려 파국을 면했다고 전해진다.
신씨는 궁에서 관리가 내려가면 필시 감나무의 해거리를 감안하지 않고 매년 똑같은 양을 채워가려할 것이고 이를 경우 오히려 사찰에 폐가 될 것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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